처를 때리고
평론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김남천은 1911년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면 성원읍 하부리에서 태어났다. 성천 인근의 중농이자 군청 공무원이었던 김영전(김해 김씨)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효식(孝植)이었으나, 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김남천은 자신의 집안이나 유년 시절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남한에 생존하고 있던 그의 형제나 일가친척들의 증언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해방 직후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 설립을 주도한다. 이후 김남천과 대립하던 카프계 문인들이 만든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라는 단체 역시 결성되는데, 이듬해 박헌영의 지시로 두 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고 김남천은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을 맡는다. 이와 더불어 다방면에 걸친 평론과 소설 역시 꾸준히 발표한다. 이후 미군정에 대한 공산당의 탄압이 심화되어 1947년 4월에 개최 예정이었던 제2차 전국문학자대회가 불발되면서 좌익 문인들의 월북이 시작되는데, 김남천 역시 남로당 계열 문인들과 함께 월북을 하게 된다. 월북 직후에는 해주에 있던 제일인쇄소를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948년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피선되었다. 이외에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북한 외부성에서 정보 업무를 다루거나 ‘문학예술총동맹’의 서기장 등을 지내는 등, 분단 직후 북한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문학 활동으로는 유일하게 1951년 단편 <꿀>(≪인민평론≫)을 발표했다.
북한 정권이 남로당 계열 문인들을 숙청할 때 김남천이 북한에서 유일하게 발표했던 단편소설 <꿀>을 문제 삼아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생활 중 일시 석방되어 다시 고향인 성천으로 내려가게 되었으나, 1953년경 그곳에서 온가족이 즉결 처분을 받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1955년 8월 즈음에 처형되었다는 설, 또는 카프 문인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김삼규에 의하면 1978년까지도 북한에서 생존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를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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