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산에서 살리라




죽으면, 한 줌의 흙이 되어
남을,
여기 우리조국 산천.

엄니도 아버지도
누나, 형, 동생도
멀리, 멀리 떨어져서
서로 서로 손짓하며
금잔디 옷 해 입고
도래솔에 싸여서,
비석 하나 세워 두고

살아서 설운 눈물
죽어서는 안 흘리며
등에 졌던 짐들 내려놓고
여기 우리조국 산천에,
흙이 되고, 바위가 되어
325.
아무 말 없이
산꽃을 바라보며
산새 울음 들으며
산짐승을 부르리라.

산에서 살리라.

























- 317 -

사람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
밤낮으로 만난다.

친한 사람 덜 친한 사람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서는
사람이 사람을 모른 채한다.

친한 사람 덜 친한 사람
모르는 사람이
사람을 알은 채 한다.

사람이 사람을 알고 있고
사람이 사람을 모르고 있다.

친한 사람 덜 친한 사람
모르는 사람을
알고 있고 모르고 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난다.

밤낮으로 만난다.
만난다.
낮밤으로.

























- 318 -

건설





이것은 거대한 오케스트라.

음정과 박자가
크기, 넓이, 깊이
무게와 합쳐져서

땅속에서 땅위에서
모양이 되어 소리 난다.

소리는 빛이 되어
사람을 부르면
사람들이 움직인다,
하늘 꼭대기로 땅속으로
오르고 내려간다.

크기, 넓이, 깊이,
무게의 모양 속으로
오르고 내려가서 모양이 되어
소리가 난다.

오케스트라 대 합창
공명하는 화음.


























- 319 -

우 연





출근 길 아침.

어느 골목길 어느 집,
대문 앞에서,

내가 만난 우연은

어느 할아버지가
아기에게,
장난감 손나팔을 불자,

방글 방글 웃는
아가의 얼굴과
할아버지의 얼굴 위에
가득한,

두 웃음이었다.































- 320-

들국화




꽃잎은 여인들의 루즈를 바르지 않아도
양귀비의 입술이며
잎사귀는 크레오파트라의 손톱이다.

서리 맞으며
무명베 조각으로 젖가슴 질끈 동여맨
사춘기 촌가시네 같은 들국화

푸른 하늘 구름 속에
가을이 기다린 꿈은
정금처럼 익어 가는데,

골짜기 물빛 속에 단풍이 불붙은 산 속
지게 짊어진 총각 같이 힘센
지난여름 비바람 속에서
키워온 뿌리들이 만들어 놓은

청자 빛 하늘 아래 춘란 군락지
다발로 핀 들국화 향기를 맡아 본일
그대들은 있는가.





























- 321 -

산다는 것이





열 살
먹은 어린이가 무언가를 응시하고
스무 살
먹은 청년이 어께에 으쓱 힘을 주고
서른 살
먹은 젊은이 마음을 밖으로 펼치고
마흔 살
먹은 중년이 몸짓을 짐짓 삼가하고
쉰 살
먹은 어른이 광야를 오고가다가
예순 살
먹은 어르신이 정년을 하여,
집을 보며, 글을 읽으시다가
세상 떠나신 분들 소식을 듣고
여든 아흔에 먼 산을 바라보실 때,
나도 따라
먼 산을 바라보고 싶다.

시간의 흐름을 회억(回憶)하면서

눈을 뜨고 사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스러워서
내 아들을, 내 딸을, 내 아내를

꼬옥 꼭 안아주고 싶다.























- 322 -

새벽에





무게도, 크기도, 넓이도
알 수 없는

커다란 손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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