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서문.



흘러간 내 시간의 발자국이 남겨놓은 여적(餘滴)을
모아본다. 하나 둘, 둘 하나,
아쉬움, 다 붙들지 못해 깨어진 체로, 흩어져 버린
파편들에 대한 연민(憐憫)이 남아 다시 그리움으로
어딘가를 가야한다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당위 사실 가치 명제들이 지친 심신을 끌어당겨
한 매듭, 두 매듭, 매듭을 지어보았다.

그대로 두어버림이 차라리 나을 일인지도 모를 일지만,
그리운 그 그리움의 낡은 이미지로,
남아버림이 더 고고하고 순수하기도 하련만,
이리 생각하면서 타다 남은 그 촉루의 흔적마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버림을
소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일상은,

그래서 그 반대의 어느 가변에 서 보는 일을 하는지도.......
평생 시를 화두삼아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은.







어느 가을 날



가을바람이
감잎을 흔드는 오후,
샘물은 바닥을 보여 줄 듯,

잠자리가 물에 뜬 낙엽 위에
앉으려다가는 날아가고
앉으려다가는 날아가고.

햇살이 그늘을 잘게 갈라
그림을 그리니
산도 내려와 배경이 되어 주는,

바람이 훼방 놓은 듯
산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던.
그 산에 놀고 싶다는 듯
유영(遊泳)하는
물고기 떼를 그려놓던,

어느 가을날의
해거름 마당.




























어머님 전상서






어머니,
청솔가지 송진내 풋풋한 솔밭
오이, 가지 굵어지고
북 감자 밑이 드는
그곳이 생각나시는지요?

어머니,
때때치가 땅개비 등에 업혀 날던
콩밭,
수숫대가 일어서면
서숙이 고개 숙이는
그곳이 생각나시는지요?

어머니,
모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들판,
황금빛으로 바뀌면
미영 꽃 목화도 피던
그곳이 생각나시는지요?

할미 당 할미꽃이 피고
돌무덤이 자꾸 높아가던
외가 가는 솔밭
그곳이 생각나시는지요?

어머니,
대 바람 소리 시원스럽고
백일홍 세 번 피고지면
떡방아 찧던
그곳이 생각나시는지요?

어머니,
장봇짐 이고 오시던 늦은 가을밤,
등불잡고 마중 나간 신작로,
이복 누나 가마 타고 그 길 따라
시집가던 날
우린 모두 뒷모습만 바라보던
눈물을 기억 하시는지요

어머니, 당신은
이 일들을 차마 어찌 잊으시고

어디 계시는지요?





8월





반짝이는 햇살.

하늘은
구름이 그려 놓은
그림 서너 점.

앉은 사람, 선사람
배가 고파지고,
졸음이 오고,

생각나지 않는
이름과
상관(相關)된 얼굴.

여인의 하얀 두 손.

































입동(立冬)




진한 커피를
왜 타서 내 놓는지,

이제 나는
할 말이 다 없어졌는데,

언젠가는
당신은 서럽게 나를 부르며
더 이상 커피를 탈
필요가 없어졌을 때,

창밖을 내다보며
꿈같은 날을 생각하겠지요.

우리 아이들 많이 컸어요.

나와 당신이
살아온 증거겠지요.































말소리 기억



풀좀매달라했드만
그래서 쓴당가, 그러면 못쓰네,
미안허고 죄송스럽그만이라우.
참 자네 어디 갔다 오는가,
다녀갈 일이제,
바빳어라우,
밭 매느라고 영금밧어라우.
무엇인가 이고 가던 것이,
팥 쪼금 대두 쪼금이 그만이라우.
사라고 했드니 없다고 해놓곤,
형님도 참 언제 없다 했등가요.
종자만 쬐금 있다 안했는게비요.
금이 어쩌든가,
글씨요, 장목에 팔아 모르겠어라우.

읍내 장터 30 리 팍팍한 고갯길
아침 안개는 들녘 마을 돌아서
산을 둘러 퍼졌는데,

장닭을 이고 가고,
오리를 이고 가고,

그날은
대나무를 깨금발로 건너뛰는
까치 새끼 몇 마리.

귀엽기만 하던 날.























파리




어느 여름 해질 무렵.

창문에 날아 든 파리 한 마리
수직 평행 반복 연속 동작은
진득한 산삼 수액 향기 숨은
습지 구멍 찾아 헤매던,

영락없는 신마니.

내가 수건으로 후려친다면
이놈은 단 숨에 나가 떨어져
생명을 마무리 하겠지,

일천구백 오십년
잠자는 동생의 얼굴에 붙은
그 파리 떼들, 그 놈들,
메뚜기 떼들처럼 어딘가로
다 날아갔는데,

그 놈들의 후손 한 녀석이
서른 해 만에 나타나
잉크 냄새나는 내 방에서
서양 산삼을 찾고 싶어서인지,

수직 평행 반복연속 동작으로
재주를 부린다.

우리 아가 잠자는 얼굴 위에서
보라는 듯이

재롱을 떨며.


















밤 풍경




멀리 직육면체가 보이고,
무슨 신호 같은
TV 안테나.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밤은 악어의 입처럼
입을 다물고,


먼 곳에서부터
안개에 포장된 듯,

하나 둘 사라져가는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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